윤곽을 따라

만져질 듯, 닿을 듯, 또렷한 듯 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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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반팔에 패딩조끼 하나 걸칠 정도로 따뜻해진 월요일이었다.
새벽에 맞춰둔 알람을
몇 번이나 snooze하느라 피곤하긴 했지만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좋아하는 오일과 향으로 기분을 한껏 끌어올렸다.

주말 내내 미뤄둔 책을 마저 읽고
(야릇하고 위험하면서도 머리가 띵해지고 끝내 웃음이 지어진 그런 책이었다)
해야할 일을 리스트 업하면서
오늘은 어쩐지 활기차고 생산적인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오전은 그랬다.
업무도 잘 진행되으며
피곤과는 별개로 활기찼고 산뜻했다.

12시 땡 치자마자
정확히는 12:01pm.
동생이 둘째 큰아빠의 부고 소식을 전해왔다.

암투병으로 위태로운 상황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머리가 웅웅거리고
가슴이 먹먹해지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감정을 터놓고자 하면 당장이라도 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직계 부모의 상을 당한 것도 아닌데
일터에서 마음껏 울면서 속상해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머나먼 타지에 나와있지 않은가.
장례식조차 갈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최대한 감정을 삭히고
오빠들에게 위로의 문자를 보내는 것 뿐이었다.

아빠는 한명의 누나와 세명의 형을 두었다.
그 중 둘째 형은 아빠와 기질도 성질도 외모도 몹시 닮은
그런 형제였다.

우리 집안 특유의 거칠고 무뚝뚝한 모습에 늘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아빠를 가장 많이 닮은 또 다른 아빠였다.

그런 아빠가 오늘 또 우리를 떠났다.

외국에 나와서 산 이후로
우리 가족은 물론이요
집안 어른들, 사촌형제들도 만나기 어렵다.
한국이었다면 못해도 명절마다 봤겠지만
이제는 내가 한국을 들어갈 때나 겨우 만날 수 있다.

이곳에 와있는 동안
제일 좋아하던 사촌오빠를 잃었고,
그 오빠의 어머니 – 나의 고모 – 를 잃었고,
내가 참 좋아했던 사람의 아버지를 잃었고,
오늘, 둘째 큰아빠를 잃었다.

그리고 나는 그 중 단 한 번도
장례에 참여하지 못했다.

참 이기적인 말일 수 있겠으나,
그나마 내 직계 가족이 아니라 다들 이해한다.
나 역시도 어쩔 수 없지.. 하고 핑계를 댄다.

하지만 그럴 때 마다 꼭 찾아오는 두려움이 있다.

엄마.
아니 동생일 수도.
아니 언니일 수도.
어린 조카일 수도.
아니 어쩌면 나 자신일 수도.

죽음엔 순서가 없으니.

우리 중 누군가에게
갑작스러운 죽음이 찾아온다면
나는 어찌해야 할까.

마지막에 서로 얼굴을 맞대고
조촐한 작별 인사나마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디까지 현실을 내려놓고
한 걸음에 달려갈 수 있을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지만
문득 걱정이 밀려온다.

이럴 때 마다
외국에 나와 사는 내 자신이
어쩐지 미워지기도 한다.

무엇을 위해?
아, 나를 위해서였지.

그런데 진짜 나를 위한게 맞나.
아, 순전히 나만을 위한 거였지.

매일 내 생각, 내 걱정하는 엄마를 남겨두고,
그런 엄마를 살뜰히 돌보는 어린 동생을 남겨두고,
일언반구 상의없이 이민을 결정한 나에게
모종의 배신감을 느껴 상처받은 언니를 남겨두고,
8살이 되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조카를 남겨두고,
몸이 떠나온지 11년이 다 되어가도록 마음이 아린 첫사랑을 남겨두고,
그렇게 오직 나 혼자만의 만족을 위해 떠나왔다.

하지만 그 결정을 후회하느냐 묻는다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지난 11년, 치열하게 살아온 나를 배신하는 말은 할 수 없다.

다만 완벽한 결정이었을까 묻는다면
꼭 그렇진 않은 것 같다고 말 할수 있다.

특히나 오늘처럼
사랑하는 누군가의 마지막 가는 길 조차
함께 지켜줄 수 없는 그런 날이 오면

내가 지금 과연 잘 살고 있는것인지,
놓치고 있는게 있진 않은지

묻고
또 묻다가
괜히 원망도 해본다.

큰아빠를 보내드리려고 적기 시작한 글이
결국 내 얘기로 끝나는 구나.
이렇게 이기적일 수가.


둘째 큰아빠,

이제 고통에서 해방되셨나요.
죽음은 어떤 느낌인가요.
지금 어디쯤 도달 하셨을까요.

첫째 큰아빠 말 마따나
우리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누나, 조카
모두 그 곳에서 만나셨나요.

기분이 참 이상해요.
종교를 믿진 않지만
그래도 정말 꼭 그랬으면 좋겠어요.

떠나온 세상에 서글프고,
남겨둔 가족에 미안하겠지만,

그리웠던 부모 자식 형제가 다시 만나
지나온 세월 회포도 풀고,
그리움도 풀어내고,
함께 얼싸안고 웃을 수 있길 바래요.

그리고 우리 안부도 전해주세요.
다들 많이 보고싶다고.

특히 우리 아빠가 제일 많이 보고싶다고 좀 전해주실래요.

못났죠?
가시는 길 따뜻하게 위로해드려야 하는데
이런 철없는 부탁이나 드리네요.

죄송해요.
그래도 둘째큰아빠가 가장 가능성이 높잖아요.
그러니까 좀 전해줘요.

그리고 큰아빠도
사랑하는 동생 꼭 안고
긴 시간 외로웠을 우리아빠 좀 달래줘요.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요, 다들.

안녕히 가셔요.
그리고 잘 지내고 계셔요.
우리 모두 열심히 살다 갈게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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