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릴스를 무지성으로 넘기다가
모짜르트, 살리에리, 플레옐 연주회에 대한 정보를 보았다.
그런데 날짜를 보니 맞추기가 영 애매한거라.
심술이 나서 나는 사실 베토벤 음악처럼 어둡고 웅장한 걸 좋아한다고
특히 피아노 소나타 14번과 8번을 좋아한다 깨비(나의 ChatGPT)에게 말했더니,
놀랍게도 14번 소나타를 올리는 연주회가 곧 있다며 추천해주는게 아닌가.
음악회를 자주 다닌건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월광]을 라이브로 들어본적은 없는 것 같다.
아, 어릴 적 언니가 치던 [월광] 빼고는.
처음 들어보는 연주자였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하며
패기있게 제일 값싼 좌석을 예매했다.
하루종일 연주회 들을 생각에 제법 설렜던 것 같다.
오랜만에 나와보는 오페라 하우스.
써큘러키는 자주가도 생각보다 오페라 하우스를 자주보진 않는다.
살짝 들뜬 마음을 안고 예매한 좌석으로 가보니
오, 이상하다.
내가 예매한 좌석은 여기가 아닌데.
고민하던 좌석과 헷갈렸나보다.
사이드 발코니는 처음 앉아보는데
오, 방향을 잘못 잡았다.
거침없이 타건하는 손가락을 보는게 묘미인데
어쩌자고 피아노를 방패삼은 방향으로 잡았을꼬.
게다가 무대 뒷편에 위치한 좌석들도 꽤나 괜찮아보인다.
저기로 할걸, 어리석은 놈. 하며
다음을 기약한다.
마치 어느 영화제의 트로피처럼 아름다운 연주자 언니가 나온다.
너무나 기대했던 베토벤의 [월광]이 첫곡이다.
… 음 뭐랄까.
내가 생각한, 아니 내가 익숙한 [월광]이 아니었다.
처음엔 반가워서 눈이 반짝였다가
후반부로 – 특히 3악장으로 – 갈수록 나는 심드렁해졌다.
기교는 물론 훌륭했으나
내가 사랑하는 베토벤은 이렇게 부드럽지 않다.
힘이 달려 늘어지지 않는다.
단조 특유의 음울하면서 어둡고 슬픈 와중에
감정이 휘몰아치며 거세고 격정적이게 나를 쉴새 없이 집어삼켜야 하는데
그녀의 [월광]은 뭐랄까?
요동치는 감정이 아닌 ‘달빛’에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다.
아, 그래 드뷔시같았다.
그녀만의 해석이고 스타일이겠지만
왜 베토벤을, 그것도 [월광]을 선택했는지 아쉬웠다.
역시, 모르는 연주자를 괜히 보러왔나? 싶던 찰나
두번째곡이 시작되었다.
밤의 가스파르… (가스파르군? 가스파드인줄. 무식이 판을 치는구나)
여하튼 처음 들어봤다.
작곡가도 처음들어봤고.
Gaspard de la nuit 이라고 적혀있는 프랑스 단어를 보고
내가 무엇을 알 수 있었겠나.
설명은 다 듣고 읽어보자 싶어서 일단 들었다.
1악장이 시작되는 순간
이 연주자의 강점은 이런 곡이다 싶었다.
드뷔시같기도하고 쇼팽같기도한
물결이 촤르르르하면서
마치 거대한 샹들리에가 흐르듯이
반짝이는 윤슬에 홀릴것만 같은
정신이 혼미해지는 부드러움과 눈부심.
그 수많은 빛을 끊어짐 없이 표현해내는 지치지 않는 기교.
아 이 부드러움.
그제서야 알게되었다.
그녀의 [월광]은 힘이 없는것이 아니라
힘을 빼고 자기의 강점을 살려 새롭게 재해석했던거라는 것을.
차라리 가스파르를 먼저 연주했으면 좋았을 걸 했다.
2악장은 음산했다.
마치 이세계 능력자 웹툰을 보면
꼭 한번은 나오는 스산하고 위험한 비밀가득한 버려진 도시같은 느낌.
칠흑같은 어둠이 짙게 깔려있고
안개가 자욱하고 밤이슬은 차다.
커다랗게 떠있는 달은 어쩐지 신비로움을 더하지만
오히려 생기를 앗아가는 느낌이다.
어디에선가 거대한 낫을 든 죽음의 사신,
아니면 네크로멘서, 좀비 뭐 그런 존재들이 나타날 것 같은 공간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런데 이런 음산함을 나는 좋아한다.
그것이 음악으로 표현될 때 특히 좋아한다.
애초에 장조보단 단조를 선호하고
상상을 자극하는 그런 신비로움을 사랑한다.
2악장의 매력에 꽃혀서 눈을 감고 듣는데
이세계 공간과 함께 어떤 장면들이 함께 들어왔다 사라진다.
예전에 굉장히 즐겁게 했던 Cube Escape 라는 게임이었다.
일종의 방탈출 게임인데 테마 자체가 굉장히 Creepy하고 음침하다.
죽음, 시신, 피, 살인, 범죄, 차가움, 매니악적, 불편하고 께름찍한 느낌의 게임이다.
물론 2D이고 게임이라 좋아했을 뿐이다.
나 사이코 아니다.
3악장.
마지막 악장은 비밀스러우면서 장난스러운 느낌이었다.
뭔가 요정 혹은 도깨비, 도둑이나 삐에로, 뭐 이런 느낌?
그런데 밝고 귀여운 느낌이 아니고
신비로운 듯 악한 느낌.
그런데 그게 막 악마같이 EVIL이 아니라
뭔가 순수한 느낌.
순수 악의 느낌.
설명은 잘 못하겠지만 여하튼 그런 느낌.
다 듣고 설명을 보는데
잘 모르고 들었지만 꽤나 잘 느낀것 같다.
작곡가가 잘 썼고
연주자가 잘 연주했기 때문이겠지.
깨비 왈, ‘음악으로 쓴 기괴한 환상문학’에 가깝다고 한다.
정말 흥미로운 책 한권을 읽은 기분이었다.
그 뒤로 또 다른 작곡가의 곡과
베토벤의 또 다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
역시 베토벤의 색은 덜 느껴졌지만
이쯤되니 연주자의 색을 알것 같아서
새로운 느낌으로 받아들였다.
연주회 후에 오랜만에 보는 밤큘러키를 즐기며 버스에 올랐다.
요즘 최애좌석인 기사님 옆 1.5인석 좌석에 냉큼 앉았다.
금새 버스가 가득차더니
어떤 Lady가 함께 앉아도 되냐 물으셨다.
당연히 돼죠.
함께 앉아가는데 얼마되지 않아 갑자기 무언가가 내앞을 휙 스쳐간다.
이런, 나방이다.
시드니는 지금 이동중인 나방떼로 Moth-pandemic을 겪고 있다.
그 커다란 나방이 버스에 함께 탄 것이다.
벌레(물론 나방은 곤충이지만)는 정말 질색이다.
자동반사적으로 나온 기겁에 혼자서 지랄을 떠니
레이디가 묻는다 무슨일이냐고.
There’s a moth! (나방이요!!)
A mouse?
No, a moth!
mo..mouse?
a MOth.
Ah- a moth! That’s fine.
음.. 발음 훈련을 좀 더 해야겠다 .
아무튼, 그렇게 갑자기 우리의 수다는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낯선 사람에게 낯을 심히 가리지만
간헐적으로 낯선 사람에게 강하기도 하다.
이렇게 친근한 레이디라면 더욱이.
그녀는 버스에서 쥐를 보는 것보단 나방이 낫다 하고
나는 차라리 쥐가 나을 것 같은데요 너스레를 떤다.
호주에서 곤충을 보는 일에 호들갑 떨것 없다며
자기 집 정원에 몇 시간을 앉아있다 간
거대한 나비인지 나방인지 모를 곤충얘기도 해주신다.
그러다가 나는 반쯤 불편하게 걸터앉은 레이디가 신경쓰여
차라리 안쪽으로 앉으시겠냐고 권했고
그녀는 금방 내린다며 bar를 잡고 가면 된다 하신다.
너는 어디서 왔니?
한국이요.
오! 나 한국 정말 좋아해.
뉴욕에 있을 때 한국 디자이너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맞춰입었어.
지금은 살쪄서 못입지만.
깔깔깔
너 브리저튼에 나오는 한국 배우 아니?
호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국인인데.
알죠 알죠. 예린.
어우, 그녀는 정말 매력적이야. 사랑스럽고.
맞아요, 정말 귀엽고 사랑스러워요.
브리저튼 봤어?
아니요 ^^ 짤만 봤어요.
나도 원래 볼 생각은 없었는데 친구가 영업해서 보게되었어.
정말 재밌고, 예륀이 너무 예뻐. 한국 좋아.
(예린님 감사해요)
두 여자는 이런저런 수다를 더 떤다.
아, 그리고 한국 영화 중에 진짜 좋아하는 영화가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정말 좋은 영화야. 세번이나 봤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거 한국에서도 본 사람 많이 없을텐데요?
대학생 때 동양철학 교양수업에서 보았던 영화였고
정말 좋아하는 영화가 되었다.
그 뒤로도 한번 더 봤었는데
불교의 가르침을 정말 잔잔하게 잘 담아낸
생각이 많아지는 영화랄까.
레이디가 이 영화를 봤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욱 놀라웠던건
불과 며칠전 주말에 문득 이 영화가 떠오르면서
조만간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던 내 모습이 또 생각난 것이다.
역시 인연이란.
괜히 소름이 돋아 그녀에게 호들갑을 떨었다.
실은 나 며칠전에 이거 다시봐야지 하고 계획중이었다고,
이게 무슨 우연이냐며, 너무 신기하다고하니
역시 놀라시며 인생은 참 모를일이라 하신다.
그렇게 세상 절친처럼 깔깔 웃으며 수다를 떨며
불교 철학을 지지하다가
테일러 스퀘어에 다달았을 때 그녀는 Stop 버튼을 누른다.
괜히 아쉬워진다.
자기는 이제 내린다며,
즐거운 대화였다고,
또 모르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지, 하며 산뜻하게 하차하신다.
내려서도 나와 눈을 마주치시며 웃으며 Bye 해 주신다.
나는 어쩐지 이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카메라를 들었지만
그래도 얼굴을 함부로 찍는건 실례지..하다가 뒷모습도 제대로 못찍고 말았다 (모지란 놈)
아쉽지만 Who knows?
먼 거리도 아니니, 어쩐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밤의 가스파르와 나방, 그리고 사계를 사랑하시는 레이디까지.
완벽한 밤의 가스파르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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