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 시들어버린 한 늙은 여인이 있다.
그녀의 속은 여전히 말갛고 고운 소녀가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 여린 소녀를 못 본채 하고
더 이상 아무 쓸모 없는 존재인 것 처럼 함부로 대한다.
가장 가까운 그녀의 가족조차.
처음엔 외롭게 늙어가는 엄마가 겹쳐보여 마음이 무거웠다.
머나먼 땅으로 떠나와 자식된 도리를 다 하지 못하는 나와
홀로 굳세게 살아가고 있을 엄마가 떠올라 죄송스러웠다.
그랬는데,
나는 어쩐지 그 속에 감춰둔 ‘소녀’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여학생 성폭행 및 투신 자살 사건에서
여성에 대한 조금의 배려도 없는 남성들의 무지각적인 폭력성과
가해자 당자사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마땅히 훈계해야할 어른들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뻔뻔함과
반성의 기미도 없는,
사실 너무나 경멸스러운 손자를 위해
스스로 역시 피해자가 되어야하는 아이러니와
어쩌면 이 기억도 곧 잃게 되리라 생각하며
꾹 참고 손자를 위해 견뎌야 했던 치욕스러운 순간.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시.
그 마음은 과연 뭘까.
왜 나오지 않는걸까.
나오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답답한 마음으로 쫓게되는 죽은 아이의 발자취.
한 발 한 발 따라가다보니 고스란히 느껴질수 밖에 없는
가엾은 어린 영혼의 상처.
아이가 사랑했을 삶에 대한 소박한 애착을
그가 너무나 사랑하는 손자와
자신을 비롯한 어른들이
죽음 이후에도 끝내 짓밟아 버렸다는 것을 알게되었을 때,
어른으로서 같은 여자로서
꽃과 나무와 작은 것들을 그저 사랑했던 소녀로서
그녀는 더이상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피해자만이 피해자를 오롯이 이해해려노력했고
처음부터 끝까지 가해자들은 가해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현실.
아네스가 사랑했던
양미자가 사랑했던
그 세상은
그저 작고 여리고 순수하고 소박한 것들이었을 뿐이었는데
왜 그들은 살기위해
스스로 떨어질 수 밖에 없었나
달콤한 향을 풍기는 잘 익은 부드러운 살구같은 그녀들은
왜 떨어지고 나서도 짓밟혀야 했나.
얼마나 무서웠을지
얼마나 무력했을지
얼마나…
살고 싶었을지.
어른으로서 여자로서 할머니로서 엄마로서 양미자로서
내려야만 했던 선택의 기로에서
아무리 써내려해도 쓰여지지 않았던 시가
마침내 아네스를 통해 쓰여진 순간.
그녀는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어른으로서 여자로서 할머니로서 엄마로서 양미자로서 피해자로서 그녀가 내린 선택은
어쩌면 남겨진 누군가에겐 해를 입힌 가해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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